사랑은, 달고 쓴 것, 기쁘고 슬픈 것,
사랑은, 정글처럼 엉클어지다가도 사막처럼 탁 트이는 것, 언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있으나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사랑은, 잊어도잊어도 다시 기억나는 것, 축복이자 저주가 되는 것, 미쳐도 미쳐도 더 미칠 수 있는 것,
사랑은, 끈질기고 지독한 것,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 모두의 가슴에 핏빛낙인을 남기는 것,
사랑은, 먹구름 자욱한 하늘 아래 검은 언덕에 서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소리치는 것.
지난달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됐던 연극 <폭풍의 언덕> 포스터
핏발 선 사랑의 강렬한 묘사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은 단발머리 소녀시절, 저를 흔들어 놓았던 책입니다.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책을 들라면 저는 이 책을 꼽을 것이고
가장 강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말해보라면 난 주저없이 히스클리프의 이름을 말할 정도죠.
책은 물론이요, 영화까지 섭렵할 정도로 폭풍의 언덕에 푸욱 빠졌었던 시절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성남아트센터에서 연극으로 <폭풍의 언덕>이 선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몇년전, 직접 폭풍의 언덕에 갔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영화로 제작되다가, 이제 연극으로 변주되기까지 하는것을 보면
폭풍의 언덕이 얼마나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줄리엣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가 열연한 영화 <폭풍의 언덕> 포스터
생각해보면, 저는 참 행운아입니다. 폭풍의 언덕을 스케치한 천경자의 도판을 뒤적거리며 그리고 천경자가 그 곳을 직접 찍은 흑백 사진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꼭 폭풍의 언덕에 서고 말리라..'하고 다짐하곤 했었죠.
그런데 직접 폭풍의 언덕에 갈 수 있게 되는, 생각지도 않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그걸 빌미(?)로 '얼씨구나'하고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요크셔에 방문을 하게 된거죠.
에밀리 부른테의 집필에 영감을 준 탑 위든즈의 광경. 요크셔 벌판위에 버려진 폐가와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에밀리 브론테가 이 장면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폭풍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의 언니는 '샬럿 브론테'입니다. <제인에어>를 쓴 작가이기도 하죠. 동생 앤 브론테도 <아그네스 그레이>를 쓰는 등 모두 문재 (文才)가 있었건만.. 에밀리와 앤은 30세 남짓, 조금 더 오래산 샬럿조차도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는 등 모두 가슴 아플 정도로 단명했습니다.
과연 그들이 살았던 하워스(Haworth)에 도착해보니 그들이 왜 그렇게 일찍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죠. 유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그들의 가정환경과 그들이 온몸으로 겪었을 혹독한 날씨... 여름에도 난롯불이 그립다는 추위, 끝없이 몰아치는 바람, 비가 오다가 금새 날이 개는 자연의 변덕..거기다가 그들이 살았던 동네로 걸어가는 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하워스로 가는 교통조차 편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번 버스를 갈아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그 곳. 그리고.. 소설에서도 묘사되는 끝없이 펼쳐지는 황야가 마치 관광지화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하워스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폭풍의 언덕 전경. 바람과 직접 맞서야 하는 언덕길... 그래서 두껍게 폴라티를 입고 그 위에 코트를 걸쳐도 추위가 가라앉지 않아서..다시 그 위에 후드티를 겹쳐입는...굉장히 언밸런스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사진안의 패션이 흉해도...이해바란다 -_-
하워드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황야가 펼쳐집니다. 마침 동네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차를 얻어타고 폭풍의 언덕 입구까지 편하게 도착했지만, 그때부터 '자연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하워스에서 이 곳까지는 약 4km이며 왕복 3시간 반이 소요됩니다. 여기까지의 길은 비교적 평탄했죠. 하지만 이 곳까지 와서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집의 모델이라고 칭해지는 탑 위든즈(Top Withens)를 빼놓고 그냥 돌아갈 순 없습니다. 또다시 4km가량 가야하는 아주 힘든 길이지만 충분히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죠.
돌담위에 걸쳐놓은 워킹 코스의 계단을 통과하기에 앞서 찍은 사진. 산책길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사다리를 통과해야 할때도 있고 바위를 오를때도 있으며 습지를 걸을 때도 있다.
탑위든즈로 향하는 길.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황량하지만 아름답습니다. 그게 폭풍의 언덕의 매력 아닐까요. 멀리 유유히 흐르는 어두운 구름과 이름모를 잡초로 뒤덮힌 황량한 언덕에서 부는 강한 바람..수시로 밀려드는 자욱한 안개는 스산하고도 서정적인 정경을 만들어 냅니다. 탑위든즈에 도착하면 확실히 이 곳이 폭풍의 언덕의 세계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건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폐허가 되었지만 오히려 원래 그랬던 것 같이 잘 어울릴 정도죠.
탑 위든즈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것을 기리는 기념문
무덤까지 파헤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안는, 격렬한 사랑...그 사랑을 빼앗아간 두 가정을 철저하게 파멸의 나락으로 밀어넣는 처절한 증오..거칠고 악마적이라고 할만큼 성격이 뚜렷한 주인공을 내세워 인간의 애증을 극한까지 나타낸 그녀의 소설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됐는지..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폭풍의 언덕을 거닐면서 뚜렷히 깨달았습니다.
책을 안읽어본 사람이라도 이 곳을 거닐어보는, 충분한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국에 가게 되면, 런던 같은 대도시만 가보시지 말고, 이곳도 한번 방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탑위든즈옆에 있는 뼈가 앙상한 단풍나무 아래서. 여기 있다보면 분위기가 절로 난다. 마치 캐시가 된듯(?) ^^
만약 폭풍의 언덕을 가게 되거든 비바람에 견뎌낼 수 있는 복장과 굽이 낮고 두꺼운 신발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야말로 황야이므로, 상점이 없기에 음식물도 가져가시면 좋습니다. 앗, 그리고 이 곳의 있는 양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있어서 음식물을 옆에서 가로챌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구요^^;
폭포와 다리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판 아래서. 방향판을 잘 보고 다녀야지, 그렇지 않으면 '황야의 유령(?)'이 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그나저나 패션 정말 심하군...-_-)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그 곳... 저도 다시 한번 꼭 가고 싶네요. 씽씽 부는 바람소리마저도, 캐시가 히스클리프를 부르던 소리로 착각했을 만큼 빠져들었던 그 곳.
제가 요크셔의 황야에서 느꼈던 감흥을 그대로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폭풍의 언덕, 일독을 권합니다. 영화, 연극도 놓치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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